어떤 경우에도 희수는 유정의 부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유정은 똑부러진 친구였다. 매사에 합리적인 판단으로 대처했고 끊고 맺는 결단력이 분명해 줄곧 과 대표를 도맡았던 국문과의 잔 다르크였다.그녀의 물음에 그는 또 빙긋 웃기만 했다. 그녀는 목을 빼 낚싯대 주변을 살폈다. 노획물을 담은 어망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이 남자.『출판하기로 했어? 제목이 좀 야하지만 내용만 단단하다면 꽤 팔릴 것 같은데.』『형, 자리 좀 바꿔요.』그런데 그렇게 도망치듯 훌쩍 떠나온 여행에서 방송 멘트를 떠올리고 있으니 아직도 그녀에겐 온전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셈이었다.결혼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먼 사이로 만들어 버리는 의식이 아닐까?『잡채밥 취소하고 아가씨나 한 명 넣어 줘요.』『은영이가 감추고 있는 매력의 일부에 불과하지.』이미 둘 사이에는 마음의 이혼이 진행되고 있었다.얼이 빠진 과장을 뒤로 하고 동선은 러시아 미녀들 쪽으로 걸어갔다.『하이힐 없이도 아름다우니까 벗겼겠죠. 이제 그만 하세요, 과장님.』상미의 물음에 희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상미는 단순히 스케줄을 물은 거겠지만 희수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뭐가 좋을까? 역시 밤낚시가 운치 있지?』그녀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젊다고 닥치는 대로 뛰어다녔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축나고 말 거예요.』그녀는 자판기로 가 커피를 뽑았다.그는 숙박계를 적을 때 어깨 너머로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었다.『쥰꼬, 당신처럼 담백한 여성은 처음입니다. 난 쥰꼬의 유난히 맑은 눈자위를 보고 첫눈에 알았죠. 세상의 모든 허위와 가식을 꿰뚫어보는 듯한 맑은 눈. 난 형편없이 사악한 인간이지만 당신 앞에선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습니다. 쥰꼬의 눈은 이 세상의 유리창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권은 다시 살고 싶은 의욕에 가슴이 설레었다. 황폐한 잿더미 속에서 희망의 싹이 한줄기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그 맑은 정신으로 상미를 보니 까닭 모를 패배감이 솟구쳤다. 그녀는 오로지 성적 에
그녀는 경계심을 드러내며 슬쩍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었다.개국 특집으로 조재봉 팀은 ‘여대생들의 성에 관한 인식’을 주제로 앙케트 쇼를 기획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이후 ‘성의 사회학’, ‘광고 속의 성’, ‘직장에서의 성희롱’ 등의 주제로 매달 히트를 날렸다.『그럼 지금도 있겠네?』야성적이고 진솔한 매력을 담뿍 소유하고 있는 송은주는 그만큼 희수가 맡은 아침 프로그램의 비밀 병기였지만, 딱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원체 시간관념이 희박해서 월, 화, 수 아침마다 스태프들을 비상대기시키곤 했던 것이다.청바지의 여자는 차마 마지막 옷만큼은 벗을 수 없어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진작부터 나머지 세 사람이 전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특권을 누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내실에 들어갔다 나온 여자는 다시 한 번 일권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나서 옆에 앉았다.남편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희수는 그 대사처럼 정열을 발산하고 싶었다.『은영이가 감추고 있는 매력의 일부에 불과하지.』『그래, 여행 잘 다녀왔어?』청년은 영화에 나오는 미국 경찰관처럼 또박또박 명령을 내렸다. 모락모락 김이 솟는 범퍼에 여자의 상체가 얹혀졌다. 청년의 발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양쪽을 번갈아 때렸다.『왜, 가을 철새 만나러?』『어제 방송 끝내고 바로 출발했대. 홋카이도에 첫눈이 내릴 거란 소식을 들었대나 뭐라나.』『거긴 작업실이야. 비울 때가 더 많지.』잠자코 듣고만 있던 연화가 갑자기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은영 씨라고 했나요?』『열두 시면 문을 닫아야 해요. 케사르 맞은편에 편의점이 있어요. 그 앞에서 기다리세요.』『친구이기도 하구.』 은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아저씨랑은 갑자기 만나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지, 서로 계산 같은 건 없었어요. 근데 지금 전화받고 계시는 분이 아저씨의 부인이신가요?그녀는 하차당하면서 연신 차비를 흥정했지만, 스코트는 연신 ‘쏘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